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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정신병자 생각들 |
2007/08/0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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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벳의 "마니차"와 코미디프로의 녹음된 웃음소리
마니차는, 간단히 정리하면 "기도를 대신 해 주는 기계"이다. 기도문이 쓰인 종이를 원통 안에 넣고 돌리고만 있으면 원통이 당신 대신 기도를 해 주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는 "객관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게 해 주는 시스템이다. (직접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긴 한데,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자동으로 돌라가게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티벳인이 아닌 이 글의 독자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은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거실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TV 코미디프로를 보는 것인데, 내가 굳이 웃지 않아도 해당 코미디프로의 녹음된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웃음이 주는 효과, 즉 긴장의 완화를 느낄 수 있다. TV가 나를 대신해서 웃어주는 것처럼.
2. 상호작용과 상호수동
새로운 전자미디어 (인터넷으로 대표되는)의 출현은 텍스트나 예술작품에 대한 소비의 패턴은 점차 능동성을 더해간다. 프로그램의 선택, 논쟁의 참여, 심지어는 프로그램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쌍방향 서사'까지 소비자는 해당 텍스트나 작품과의 대화적 관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 부분이 뉴 미디어의 민주주의적 잠재성에 대한 찬미의 첨단이다. 이 부분을 간단하게 "집단 지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부분이 상호 수동성인데, 단지 수동적으로 쇼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수동성을 갖는 것, 나에게서 수동성을 빼앗는 것,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쇼를 즐기고 자발적인 향락의 의무에서 해방시켜주는 상황이다. 병자군에게 있어서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방 한 구석에 수북히 쌓여 있는 드라마, 영화 등을 '구워 놓은' CD들인데, 해당 영상물은 반 이상 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 영화에 대해 얘기라도 할라 치면 괜시리 나서서 본 척, 아는 척 하게 되는 비루한 상황을 병자군은 가끔 연출하게 된다. 실제로는 보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내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보지도 않은 영화를 잘 아는 것마냥 만족감을 느낀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병자군의 CD들은 상징적 등록의 매체로서 대타자의 역할, 즉 1.에서 언급한 마니타의 역할을 수행한다.
보지도 않은 영화를 봤다며 아는 척 하는 병자군의 행동은 해당 화재를 꺼낸, 거의 틀림없이 해당 영화를 봤음이 분명한 대화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이상 디테일한 얘기를 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고자 하는, 그래서 병자군이 가지고 있는 만족감이 단지 '대리만족'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제 병자군'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는 '대타자인 병자군'의 방어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행위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지 못하게 막기 위한 "가짜 행위"가 된다.
3. 가짜 행위
보통의 경우, 사람들의 행동은 무엇인가를 바꾸기 위함이지만 (그렇게 보이지만,)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않기 위해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금방 무슨 일 때문에 싸워서 서로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 친구들 사이의 어색한 침묵 속에서 억지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침묵 상태로 인해 내재된 긴장을 대면하도록 압박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그 침묵상태를 피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두 친구가 실제 싸움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피하기 위한 행위이다.
4. 대타자 뒤에 숨은 내면
유명한 인류학적 일화에 따르면, 자신의 새의 후손이라고 믿는 한 원시부족에게 '정말 그렇게 믿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들이 한 대답은 "물론 아니지요, 난 바보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 중 몇몇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고 하더군요."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어떤 것 (이 경우는 조상, 만일 위의 경우에 제사, 차례를 대입한다면, 전통 문화 등등...)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은 "고상한, 이성적인, 기타 등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내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고상한,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투사하기 위해 자신의 어떤 부분을 무엇인가에 투영해 객관화시켜 버린 것일 수 있다.)
병자군은 종종 PC통신 시절, 또는 이 정신병동 블로그를 통해 '온라인으로' 알게 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실제 아이덴티티'가 통신상, 또는 웹 상에서 보이는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물론, 통신으로만 알던 병자군을 실제로 만나게 된 상대방이 '이런 사람일 줄 정말 몰랐다' 며 더더욱 놀라워하경우가 훠얼~씬 더 많긴 하다...-_-;;;) 그들에게 있어 웹 상에서 노출하는 정체성은 (병자군이 인터넷 정신병동에서 노출하는 정체성은) 위에서 믿음을 투영한 어떤 것 같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에고'의 압박에서 벗어난 '순수한 이드'가 아닐까? 그러한 순수한 이드가, 그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라는 프로이트가 정의한 이드의 성격에서도 보여지듯이, "찌질함"이라는 것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5.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
라캉의 텍스트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해설에 따르면,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성은 수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 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 근거는 위의 3.항에 제시한 가짜 행위에서 찾고 있는데, 즉 스스로를 활발한 참여자라고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위에 얘기한 가짜 행위, 즉 병자군이 실제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낼 핵심적인 질문을 정말 영화를 본 사람이 던지지 못하도록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어보이는 아무 얘기나 마구 떠들어대는 식의 행동을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반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일견 나름의 분석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병자군 역시 특히 지금 '디 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들이 짜증스럽다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지능형 안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당 영화에 대해 찬양 일색의 얘기만 늘어놓는 포스트/댓글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영화에 대한 무슨 신앙고백에 가까운 어떠한 글은 너무나 짜증이 나서 주말에 예약한 표를 확 취소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별다른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영화 개판이라고 깎아내리는 포스트/댓글 역시 정말 뭐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 것 역시 사실이다. (병자군이 이번 주말에 '디 워'를 봐야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게 온갖 저주를 퍼부어놨는지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양자의 경우, 모두 결국 상황을 바꾸어놓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악평'을 쓰는 이유가 그 영화를 많은 사람이 보게 않게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라는 병자군의 해석이 사실이라면, 어떤 영화에 대한 저주글은 원래 별 생각 없었던 병자군을 결국 8,000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서 영화를 마침내 '보도록 결심'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그 반대의 경우인 '신앙고백'의 경우, 지금도 병자군은 '예매취소'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한 명이라도 더 '희생'되는 사람을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진 글은 한명의 예비관객을 만들었으며, 한 명이라도 더 '축복받게'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진 글은 한 명의 예비관객을 깊은 고민에 빠뜨렸다.
지금 시점에서, 병자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병자군은 이번 주말에 그 영화를 보러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약 4~5시간의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여 정보들을 모은 결과가 이 모양이라면, 도대체 정보라는 것이 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인가?
위에 주저리주저리, 여기저기 책에서 읽은 얘기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논리의 전개대로라면, 집단지성의 발현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할 진짜 행위와 가짜 행위를 구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 것인가?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은 '아레오파기티카'에서 "모든 주의와 주장을 이 땅위에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면 진리도 거기에 있을 터인데, 허가를 받게 하고 금력으로 금지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의 힘을 의심하는 부당한 일을 하고 있다. 진리와 거짓이 서로 다투게 하라. 어느 누가 자유롭고 개방된 대결에서 진리가 패배하리라고 보단 말인가?" 라고 쓴 바 있다. 병자군은 이 말을 정말 좋아하고, 앞으로 하는 모든 일에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싶다. 그러나 또한 한편에서는 이러한 이상론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과연 정말로 이러한 이상이 현실로 닥쳐온다면, 타인은 고사하고 과연 병자군은 스스로 준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포스트는 상당부분 웅진 지식하우스 출판의 "How to Read - 라캉" (슬라보예 지젝/박정수)를 참조한 글입니다. 해당 텍스트를 읽어보시면 이 부족한 포스트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얘기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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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민노씨.네 2007/08/07 01:28 x
제목 : 디워 현상 ; 권위적 비평권력의 붕괴와 대중 나르시시즘의 도래
1. 디워논쟁이 과열되는 이유디워논쟁이 과열되는 이유는 '취향'과 '해석'의 차이에 있지 않고, 그 해석과 취향을 전달하는 '태도'에 있다고 본다. 디워를 비판하는 진영도 디워를 옹호하는 진영도 마찬가지다. 왜 서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만 말하나? 그런데 과연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나 있나? 김현은 독재 메카니즘을 동어반복에서 찾는다. 독재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옳다. 왜냐하면 나는 옳으니까. 대화는 불가능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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